건초더미 기도운동 (Haystack Prayer Meeting)

  • 건초더미 기도운동(Haystack Prayer Meeting)
    • 17세기 이후 세계의 영적 흐름을 바꾸어 놓은 중요한 사건이 있다. 바로 1806년에 뉴잉글랜드 윌리암스 칼리지에서 일어난 “건초더미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이다. 이 기도회 사건을 계기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위대한 미국의 학생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열방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806년 당시 미국은 지금의 New England 지방을 중심으로 정착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청교도들의 선교정신을 이어받아 복음전파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하였지만, 아직 다른 나라에 대한 선교적 관심은 없었다. 그러던 중 뉴잉글랜드의 커네티컷 주 리치필드(Litchfield) 지방을 중심으로 제 2차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면서 신학교가 생기고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고조되기 시작했다.

      뉴잉글랜드 리치필드(Litchfield)의 부흥운동은 메싸추세츠의 윌리암스 타운(Williamstown)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그 이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이 월리암스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 증 제임스 리차드(James Richards), 사무엘 밀즈(Samuel J. Mills), 하비 루미스(Harvey Loomis), 바이람 그린(Byram Green), 프랜시스 로빈스(Francis Robbins), 다섯 학생은 윌리암스 마을과 대학 안에 영적 부흥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기도하다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만나게 되고 함께 정기적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게 된다.

      그러다가 1806년 8월 초 어느 토요일, 사무엘 밀즈를 비롯한 다섯 명의 학생들은 Hoosic River 강변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급히 소나기를 피해 근처에 있는 건초더미(Haystack) 속으로로 몸을 피했고, 이들은 그 곳에서 세계선교의 대한 비전을 품고 기도하기 시작한다. 이 때 기도회를 인도하던 밀즈는 성령께서 주시는 영감을 받아 “우리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We can do this if we will)” 고 하면서 해외 선교를 위해 기도했다. 이들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검은 구름은 지나가고 파란 하늘이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이들은 여름 내내 그 숲 속에서 해외선교를 위해 기도했고, 이 기도회는 1807년 이듬 해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이 미국 청년들 사이에서 일어난 해외선교를 위한 첫 기도모임이었던 셈이다.

      학생선교동원운동(SVM)

        • 사무엘 밀즈를 비롯한 다섯 명의 청년들은 1808년 9월 7일 캠퍼스의 한 강의실에 모여서 해외선교를 위해 만든 “형제단 헌약(The Constitution of the Brother)”에 서명한다. 그 후 그들은 이 형제단 모임(The Society of Brethren)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를 늘려 나갔고, 사무엘 밀즈를 비롯한 첫 기도모임의 다섯 명은 윌리암스 대학을 졸업한 후 주변의 신학교와 예일, 프린스턴, 하버드 대학으로 재입학 해서 세계선교에 동참할 학생 헌신자들을 확보해 나갔다. 첫 기도 모임의 다섯 명 중 네 명은 1810년 6월 28일 당시 브레드훠드(Bradford)에서 열리고 있던 교단 총회를 찾아가 자신들을 해외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한 교회선교위원회를 설치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 결과 최초로 미국교회선교위원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가 만들어지고, 2년 후에는 그들 중 세 명과 또 다른 두 명이 선교사로 파송받아 인도로 떠난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이 선교 형제단을 통해 많은 대학생들이 선교에 동원되어 선교 불모지였던 아시아로 나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여 역사한다. “건초더미 기도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속속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건초더미 기도회”가 있은 지 무려 71년 후인 1877년, 대학생 복음 역사와 세계선교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던 YMCA학생 총무 루터 위샤드(Luther Wishard)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무엘 밀즈의 선교정신을 잇고자 눈보라 치는 어느 날, 윌리엄스 대학을 방문하여 건초더미 기념비(Haystack Monument) 앞에 엎드려 서원을 드린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의 이 기도는 1806년 사무엘 밀즈가 건초더미 속에서 “We can do this if we will” 하고 드렸던 바로 그 기도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6년 후에 인도에서 오랜 선교활동으로 건강이 나빠져 1883년경 미국으로 돌아온 로열 와일더(Royal Wilder)라는 선교사가 있었다. 그의 아들인 로버트 와일더(Robert Wilder)는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한다. 그는 사무엘 밀즈가 했던 것처럼 자신이 다니는 대학에 학생 100명을 선교에 동원하기 위한 모임을 만든다. 그리고, 때마침 루터 위샤드는 영국 선교에서 큰 성과를 얻고 고향 메싸추세츠 노스필드(Northfiled)에 머물고 있는 38세의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에게 한 달 간의 성경사경회를 열어 줄 것을 요청한다. 이 집회가 1886년 7월 1일-31일에 열렸던 역사적인 헐몬산(Mt. Hermon) 수양회이다. 로버트 와일더는 프린스턴 학생들과 함께 이 집회에 참석한다.

          이 수양회에 모두 89 대학으로부터250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무디의 초청으로 선교에 대해 설교하기로 했던 피어슨 박사(Dr. A.T. Pierson)는 “모든 사람이 모든 곳으로 가라(All should go, and go to all)”고 외치며 이 세대에 세계복음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헐몬산 수양회가 무디가 인도하였던 성경사경회였던 만큼, 무디가 참석했던 청년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수양회에서 로버트 와일더와 존 모트(John Mott)라는 대학 2년생(로버트는 당시 대학 4학년생)과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해외 선교가 되는 것이 나의 인생의 목표이다(It is my purpose, if God permit, to become a foreign missionary)”라는 서약을 골자로 한 “프린스톤 서약’(Princeton Pledge)”을 만들고 참석한 청년들에게 서명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헐몬산 수양회에 참석했던 250명의 참석자 중 100명이 “프린스톤 서약”에 서명하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서약은 “학생 자원자운동(SVM: Student Volunteers Movement)”이라는, 미국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생 선교운동을 태동시킨다. 존 모트를 회장으로, 로버트 와일더를 순회 총무로 선출하여 “우리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 하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는 슬로건을 걸고 1888년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1930년 때까지 20만 명의 선교 헌신자와 2만 5백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생 선교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건초더미 아래에서 시작된 다섯 명의 기도모임이 19세기 초의 미국선교역사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 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된 부흥의 물결이 건초더미 기도회를 통해, 청년선교운동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뉴잉글랜드의 부흥의 물결은 당시 땅끝이었던 한반도에 까지 밀려오게 된다. 1885년에 우리나라에 왔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와 아펠셀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는 1883년, SVM가 창설된 첫 해, 커네티컷(Connecticut) 주(州))의 하트포드(Hartford)에서 열린 전국 신학생대회(The American Inter-Seminary Alliance)에 언더우드는 뉴브룬스위크(New Brunswick) 신학교 대표로, 아펜셀러는 드류(Drew) 신학교 대표로 대회에 참석했다. 그 대회에서 조선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된 두 사람은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 항구에 첫 발을 딛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이어 수많은 청년대학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위해 헌신하게 된다. 그 결과, 조선의 젊은이들은 민족의 장래를 책임지는 선구자들로 변화된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원동력이었던 토마스 하디(Thomas A. Hardie, 1865-1949) 역시 학생자원운동을 통해서 조선에 온 선교사였다.
    • 출처: Renew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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